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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승必勝 Ver 2.0 연영석 
Phill Soong Ver 2.0 - The Song on the Road

2007.12.26.Wed.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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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태준식
제작년도 : 2007 / 러닝타임 : 90min / 제작국가 : 한국

<시놉시스>
문화노동자이자 가수, 그리고 활동가인 연영석. 그의 음악은 살벌한 신자유주의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고단함을 위로하지만 동시에 그 자신의 피곤한 삶과 현실을 구성한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위로하듯 그의 현실을 규정하는 음악을 통해 연영석은 삶의 방식에 가장 큰 동력으로 음악을 선택했고 그리고 살아가고 있다. 고통받으며 위로받는 이 모순된 현실 속에 그래도 그는 뚜벅 뚜벅 세상 속으로 걸어들어가 승리의 조건에 대해 성찰하고 있는 것이다. 거리와 합주실과 녹음실과 옥탑방에서 토해내는 그의 음악을 들어보자. 그리고 승리를 확신하기 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승리가 무엇인지 그려보자.

<연출의도>
‘필승’은 노동운동가 연작시리즈이다. 지독히도 잔인한 삶의 현장에서 노동운동가들의 현실을 담아 조심스럽게 ‘필승’을 다짐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두 번째 인물인 연영석은 한명의 음악가이지 활동가, 또한 사회적 노동을 하는 노동자로서 그의 음악을 조심스레 되새김질하기 위해 선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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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다큐필

    | 2007/12/27 15:03 | PERMALINK | EDIT | REPLY |

    이렇게 사는 것이 필승이다


    - <필승必勝 Ver2.0 연영석>(태준식, 2007)



    마지막 순간 연영석은 말한다. 이렇게 사는 것이 필승 아니냐고. 이렇게 사는 것, 이렇게 살아가는 것, 이렇게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것, 이런 삶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것, 이것이 곧 필승의 내용이요 형식이라는 전언. 맞다.
    노동운동가 이야기는 흔해빠진 소재다. 실제로 이런 내용과 소재의 다큐멘터리가 얼마나 많이 혹은 얼마나 드물게 만들어졌느냐의 여부를 떠나 이것은 정말 ‘흔한’ 이야기라는 뜻이다. 우리에게, 적어도 내게 이것은 아주 익숙한 이야기다. 물론 이는 내가 발붙이고 사는 이 땅의 현실이 그런 낱낱의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는 뜻도 된다. 그래서 단지 또 한 명의 노동운동가 이야기를 확인하기 위하여 이 다큐멘터리를 본다는 것은 어찌 생각하면 시간낭비일 수도 있다. 본다는 행위 자체가 ‘운동’의 한 요소일 수는 있다. 그러나 다큐멘터리라는 영화를 ‘즐기는’ 관객으로서 이것은 어지간히 심드렁한 일이라고 하는 것이 내 솔직한 고백이다.
    그렇다면 같은 노동운동가라도 노래하는 노동운동가라면 무언가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이 다큐멘터리의 실질적인 주인공 연영석은 노래하는 노동운동가다. 분명히 그런 것 같다. 이 다큐멘터리 전체가 그렇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노래하는 노동운동가인지, 노동운동을 하는 가수인지를 가려보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일까? 이 다큐멘터리를 보는 동안 나는 뜬금없이 이 점이 궁금해졌다.
    물론 이렇게 사는 것이 필승 아니냐고 다소 쑥스러운 미소로 답한 연영석의 태도로 미루어볼 때 그는 어쩌면 이런 질문 자체를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노래하는 노동운동가인지, 노동운동을 하는 가수인지, 하는 질문이 그렇게 중요한가?’ 하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요컨대 이것은 전혀 나 혼자만의 궁금증일 뿐이다. 혹은 이 궁금증이라는 필터를 통하여 이 다큐멘터리를 보겠다는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러니까 내가 문득 이런 질문을 던져보고 싶어진 것은 이 다큐멘터리를 정체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작품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는 조금은 엉뚱한 착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 땅의 노동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는, 솔직히, 쌔고쌨다. 나는 우리나라 다큐멘터리의 이런 편향성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이는 나만의 생각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적어도 나는 우리나라 다큐멘터리가 소재나 주제의 측면에서 편향되어 있다고 느끼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내가 노동자 계급에 속하느냐 아니냐의 여부와는 상관이 없는 문제다. 혹은 내가 이 땅의 노동현실에 대하여 얼마나 관심이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와는 상관이 없는 문제다. 다큐멘터리는 영화다. 그런 내용의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행위가 운동일 수도 있고, 그런 다큐멘터리를 보는 행위 또한 운동일 수 있다. 혹은 그런 다큐멘터리에 출연하는 행위까지도 일종의 운동일 수 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는 어디까지나 영화다. 영화의 한 종류일 뿐이다.
    나는 여기서 관람이라는 체험을 경시하는 태도를 ‘느낀다.’ 영화 상영이란 주지하다시피 대단히 폭력적인 방식이다. 깜깜하게 불을 다 끄고 문을 다 닫아놓은 밀폐 공간 안에 사람을 앉혀놓고 거의 강제적으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못하도록 해놓은 채(눈을 돌린댔자 캄캄한 어둠 속에서 보이는 것이 있을 리 없다.)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것. 이것이 영화 상영과 관람의 방식이다. 얼마나 폭압적인가.
    그렇기 때문에 영화는 관람자, 그러니까 관객에 대한 배려라는 차원을 어떤 방식으로든 지녀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다큐멘터리도 영화인 한 이런 태도를 기본적으로 깔고 있어야 한다. 영화를 ‘재미있게’ 만들라는 뜻이 아니다. 자신이 다큐멘터리로 만들려는 소재 혹은 주제가 대한민국 다큐멘터리(라는 세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지점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나는 대한민국 다큐멘터리가 소재와 주제의 측면에서 분명히 ‘편향’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이 편향 자체가 이 땅의 현실의 반영이라는 점은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부정할 수 없는 한, 다큐멘터리 관객으로서 나는 좀 더 다양한 소재와 주제의 다큐멘터리를 즐기고 싶다는 고백을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이 지켜야 할, 혹은 고려해보아야 할, 그 다큐멘터리를 보는 관객에 대한 예의, 라고 하면 너무 거창한 표현인 걸까. 물론 여기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미 그런 내용의 다큐멘터리를 보려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는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하여 그런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 문제제기는 대한민국 다큐멘터리의 총체에 대한 것이다. 그냥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문득 이런 일련의 생각들이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다시 애초의 논점으로 돌아오자.
    나는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주인공 연영석이 노동운동을 하는 가수인지, 노래하는 노동운동가인지가 문득 궁금해졌다. 어느 쪽이든 무슨 상관이냐, 그게 그렇게 중요하냐고 반문할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궁금한 걸 어떻게 하나. 물론 그 둘은 같은 것의 다른 이름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정답에 가까울 것이라는 생각은 이쯤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것이 이 다큐멘터리가 그리고 있는 연영석의 삶에도 가장 잘 어울리는 답인 것도 같다.
    하지만 노래가 무엇인가, 가수가 무엇인가, 노래는 예술인가 아닌가, 하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생각을 과감히 무시하지 않는 한 나는 이 정도의 답으로 만족할 수 없다. 연영석, 그는 노래가 좋은 것인가, 노동운동이 좋은 것인가? (아니, 노동운동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는가? 노동운동이라는 것을 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세상이 좋은 세상 아닌가?) 분명한 것은 노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노래를 짓고 부를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연영석은 노래를 분명히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노래를 그저 부르는 것과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노동운동을 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여기에 비나 원더걸스나 소녀시대나 장윤정 같은 사례를 끌어와 비교해볼 수는 없다. 차라리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같은 사례가 더 어울린다. 음악이 생명이요 삶이었던 사람들. 베토벤에게, 모차르트에게 음악은 삶 그 자체였지 않은가? 내가 보기에는 연영석에게도 노래는 삶 그 자체다. 한데 그 삶이 노동운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그 둘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이 다큐멘터리는 그렇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연영석도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같은 예술가인가? 이 질문에는 선뜻 대답할 말을 찾기가 힘들다. 예술가라면 그는 노래를 삶보다도 운동보다도 더 좋아해야 한다. 이런 기준으로 생각하면 연영석은 예술가는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그가 예술가가 아니라고 단정하고 나면 어딘가 허전하다. 이것이 문제다.
    그렇다면 연영석은 누구인가? 아니, 무엇인가? 그는 가수인가, 노동운동가인가, 예술가인가? 아니면 괴물인가? 집회에서 노래 부르는 대가로 15만 원을 받는 문제를 놓고 고민하는 그는 도대체 무엇인가?
    물론 태준식 감독이 이 다큐멘터리를 지금까지 내가 제기한 문제들에 답을 하거나 그런 문제를 깊이 천착하려는 의도로 만든 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다만 연영석이라는 한 인물의 삶을 보여줄 뿐이다. 우리가 그의 삶의 모습을 보고, 그의 발언을 듣고 이 다큐멘터리를 혹은 연영석 그의 삶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든 그것은 어디까지나 관객인 우리의, 나의 문제일 뿐이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은 한 편의 영화가 한 사람의 관객에게 이렇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는 사실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연영석 그는 필승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 바로 이것이다. 아니, 연영석 그는 스스로 필승의 삶을 살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는 것, 바로 이것이다. 그렇게 확신하는 한 연영석 그는 계속 지금과 같은 삶을 고수할 것이다. 그 삶 자체를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는 분명히 예술가다. 노래하는 노동운동가, 혹은 노동운동을 하는 가수라는 예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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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밴드 Worker’s Band

2007.12.19.Wed.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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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이장섭

제작년도 : 2007 / 러닝타임 : 75min 30sec / 제작국가 : 한국

<시놉시스>
자신들의 처우 개선을 위한 궐기와 투쟁을 위해 만들어진 이주노동자 밴드 'Worker's Band'.
그들은 점차 음악적 갈증을 느끼고 투쟁을 위함이 아닌, 음악 자체를 위한 무대를 갈구한다. 다큐를 찍던 연출자와 동네 친구 브라이언(캐나다)이 밴드에 합세하면서, 이들의 이러한 갈구가 현실로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개성 넘치는 각 멤버들의 일상과 이들의 좌충우돌 홍대 라이브 클럽 도전기.

<연출의도>
주인공 이주노동자 밴드 'Worker's Band'. 힘든 노동 속에서도 밴드를 결성하고 음악을 즐기는 그들의 모습은 놀랄 만큼 에너지가 넘친다. 항상 주변으로만 느껴왔던 그들, ‘이주노동자’. 그들도 우리의 그것만큼 소중한 일상과 꿈이 있으며, 같은 하늘아래 호흡하고 있는 우리의 이웃이라는 것을 그들의 음악과 소박한 일상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 또 자칫 어두울 수 있는 소재를 ‘음악’과 '젊음'이라는 코드로 유쾌하게 풀어 나감으로써, 보다 많은 이들의 공감과 마음의 변화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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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다큐필

    | 2007/12/20 14:05 | PERMALINK | EDIT | REPLY |

    여가를 즐기는 인간의 발견

    - <직장인 밴드>(이장섭, 2007)


    ‘이주노동자’라는 명칭의 이 갑갑한 협소함― 우리가 어느덧 우리들 속 깊은 곳까지 들어와 있는 그들을 이런 명칭으로 부르기를 멈추지 않는 한 그들은 우리의 의식 속에서 그저 일만 하는 기계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 똑같은 ‘직장인’이라는 것. 요컨대 그들도 휴가를 필요로 하고, 여가도 필요로 한다는 것. 일하는 만큼의 휴식과 놀이가 필요하다는 것. 우리와 똑같이. 하지만 이 인식은 생각만큼 쉬운 것이 아니다. 그들을 ‘이주노동자’라는 명칭으로 규정하고 부르는 한 그렇다. 그래서 이 다큐멘터리의 우리말 제목이 ‘노동자 밴드’가 아니라 ‘직장인 밴드’인 것이다. 여기에 이 다큐멘터리가 지향하는 바가 놓여 있다.
    우리가 그들을 ‘직장인’으로 여기는 순간 그들은 비로소 우리와 똑같은 존재가 된다. 그래서 감독은 연출을 하다 말고 그들 속으로 어울려 들어가 그들과 함께 노래를 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어우러지는 순간만큼은 감독도 일개 직장인이기 때문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다큐멘터리 연출자라는 직장인. 그러니 이 다큐멘터리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결국 하나의 밴드를 매개로 하여 직장인과 직장인이, 이주 노동자와 감독이, 그리고 국적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여가를 즐기는 사태에 다름 아니다. 이 다큐는 바로 이 여가를 그려냈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다.
    그들이 여가를 필요로 하고, 여가를 즐길 수 있고, 여가를 위하여 자기 삶의 일부분을 기꺼이 투자할 수 있다는 사실의 자각. 그 여가에서 이주노동자만의 생활의 고충을 견뎌낼 힘을 얻는다는 것. 이주노동자의 여가라는 테마. 이 테마를 위하여 감독은 그들과 함께 그들의 여가를 즐기고, 그들의 여가에 동참하고, 심지어 스텝들조차 그 여가의 현장 속으로 끌어들여 모두가 한데 어우러지는 절경을 연출해낸다. 그러니 아무리 그들이 불법체류자의 신세로 언젠가는 강제추방 당할 위기에 처해 있어도, 또 실제로 추방을 당해도, 그렇게 어우러지는 순간에 만큼은 너와 내가 없이 함께 즐길 수 있다. 이 사실의 확인이 값지다. 즐기는 인간의 발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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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아이 Lineage of the Voice

2007.12.12.Wed.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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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백연아
제작년도 : 2007 / 러닝타임 : 100min / 제작국가 : 한국

<시놉시스>

‘미쳐부리게’ 소리를 좋아했음에도 정작 본인은 그것을 할 수 없었던 수범이 아버지는 여섯살짜리 아들에게 이 소리를 시킨다.  수범이는 아버지에게 서럽게 맞아가면서도 완창에 4시간 반이 걸리는 <심청가> 를 6년만에 띈다. 수범이는 이제 어려서부터 품에 넣고 소리를 주던 이임례 명창을 떠나 국창 조상현 선생에게 <춘향가>를 배우려 한다. 
아버지에게서 귀동냥으로 배운 판소리로 세살때 부터 공연을 시작한 성열이는 전국 방방곡곡에 할머니 팬들을 가지고 있는 7년차 공연 베테랑이다. 알콜 중독인 아버지로 인해 때때로 폭력에 휘둘리기도 하는 성열에게 소리는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라 아버지와의 관계를 지켜주는 방패이다.

<연출의도>

자기가 ‘꿈’이라고 생각했던 것, 그러나 이루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그것’을 온전히 아들에게 투사하는 아버지와, 잘못된 ‘꿈’을 꾸어왔다고 생각하면서도 더 이상 ‘꿈’이 아닌지도 모르는 ‘그것’을 부둥켜 안고 아들에게 전해주는 아버지.
영화의 주인공인 두 소년이 사는 삶과 환경은 너무나 다르지만 그들은 같은 노래를 부르며, 그들에게는 각자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아버지가 있다. <소리아이>는 ‘소리’라는 공통점을 가진 두 소년의 개인적인 삶, 그 속에서 소년들이 갖게 되는 기대와 불안, 그리고 성장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들에게 모든 것을 건 ‘아버지’와 자신의 모든것을 걸어야 하는 ‘판소리’. 그 사이에서 두 소년이 갈등하는 동안 카메라는 2년에 걸쳐 이들 곁에서 소중한 변화의 순간들을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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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다큐필

    | 2008/01/18 11:26 | PERMALINK | EDIT | REPLY |

    들리는 소리, 보이는 소리

    - <소리아이>(백연아, 2007)


    임권택의 <서편제> 한 부분은 그대로 <소리아이>의 한 부분이다. <소리아이>를 보고 있노라니 <서편제>가 얼마나 위대한 작품인지를 새삼 알겠다. 송화도 한때 소리아이였다. 아비가 자식을 소리꾼으로 만드는 일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모습 또한 어찌 그리도 똑같은가. 김명곤의 연기가 얼마나 명연이었는지도 새삼 알겠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 버전의 <서편제>다. 그렇게 볼 수밖에 없다. <서편제>의 그림자가 <소리아이>를 보는 내내 스크린 저 너머에서 어른거렸다. 아마도 이 다큐멘터리의 감독도 <서편제>를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감안했던 것일까. 카메라가 뒤로 빠져 롱 쇼트의 화면을 만들어낼 때, 그 롱 쇼트의 화면 속에 소리아이와 소리아이의 소리를 함께, 동시에 담아낼 때 그것은 속절없이 <서편제>였다. 정일성의 카메라를 <소리아이>가 자꾸 흉내 내려 했다고 말하면 일종의 모독이 될까?
    이상한 것은 소리를 소리만으로 들을 때와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소리를 들을 때의 감흥이 다르다는 점이다. 영화 속으로 들어온 소리는 이상하게 감동적이다. 생각해보라. 이따금 TV에서 보여주는 판소리의 패턴을. 얼마나 따분한가. 물론 TV화면과 극장의 스크린을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다. 또 TV의 카메라와 영화의 카메라는 같은 방식으로 소리꾼을 찍지 않는다. 찍을 수도 없다. 그러니 좀 더 공정하게 말하자면 TV 속의 소리가 따분한 것이 아니라, TV 자체가 따분한 매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서편제>가 그렇게 만들어놓았다. 나는 <소리아이>를 보면서 마치 그 모든 인물들이 스스로(!) <서편제> 속 인물들을 흉내 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전혀, 따분하지 않았다. <소리아이> 속 소리는 <서편제> 속 소리가 그랬듯이, 감동적이었다. ‘소리’에 관해서라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한데 문제가 있다. <소리아이>가 지향하는 바는 도입부에 다 나와 있다. 이 영화의 목표는 ‘아이’가 아니라 ‘소리’다. 그래서 <소리아이>가 관객에게 처음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이’가 아니라 ‘소리’다. 그렇다. 영화는 정말 ‘소리’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보여준다. 놀라워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이미 <서편제>에서 눈 덮인 산을 바라보며 소리 연습을 하는 송화의 뒷모습에서 소리를 들은 것이 아니라, 보았다. 이 경험은 일종의 원체험과 같아서 소리와 관련한 어떤 영화를 보더라도 때마다 되살아나 우리의 경험을 통제하고 간섭할 것이다. 싫어도 어쩔 수 없다.
    문제는 정작 ‘아이’가 아니라 ‘소리’를 보여주겠다고 선언은 해놓고, 이 다큐멘터리는 점차 ‘아이’ 쪽으로 방향을 튼다는 것이다. 여기서 일종의 서브플롯들이 몇 가지 생겨난다. 이 서브플롯들은 아비와 아이, 소리와 아이, 재능과 아이, 가르침과 배움, 스승과 제자, 경제력과 재능, 욕망과 재능 따위의 대립개념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들이다. 여기서 소리는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소리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영화는 끊임없이 소리를 들려주지만, 더 이상 보여주지는 않는다. 아니, 보여주지 못한다. 끝까지 그렇다. 애초의 선언이 무색해지는 대목이다.
    결국 영화는 이 대립개념들의 길항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도록 관객을 유도하는 데 에너지를 쓴다. 소리를 보여주려는 애초의 의도가 가까스로 살아나는 것은 영화의 맨 마지막 부분에 와서다. 두 소년의 각기 다른 목소리가 똑같은 하나의 소리를 부를 때, 아니 할 때, 비로소 소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많이 늦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 그렇다고 느꼈다. 영화가 끝나고 남는 아쉬움의 8할은 이 때문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든 생각이지만, 이 다큐멘터리가 말의 엄격한 의미에서 정말로 완성되려면 아이들의 변성기까지 가야 한다. 변성기 이후 소리와 이 아이들의 관계가 어떻게 바뀌는지가 진정한 핵심이다. 아니, 그것이 핵심이어야 한다. 하긴, 그건 그때 가서 또 찍으면 된다. <소리아이>를 보면서 이 열 살 혹은 열한 살짜리 이 아이들을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바로 그 운명적인 미래에 대한 마땅한 우려 때문이기도 하다. 아이들이 그 운명을 이겨내고 명창으로 거듭나기를 소망하는 마음을 감독은 어쨌거나 관객의 마음속에 지펴놓는 데 성공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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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보드 레코드 Billboard Records

2007.12.05.Wed.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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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찬동 | 2007 | 80min | DV | Color | Documentary

<시놉시스>
내(감독) 고향 전남 순천에 학창시절부터 다니던 ‘빌보드레코드’라는 음반가게가 있었다. 3년 전 문을 닫았지만 세가 나가지 않아 외관 그대로 아직 남겨져 있다. 고향집을 오가는 동안 그곳을 바라볼 때마다 그곳에서 구입했던 음반들과 만났던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라디오와 음반을 통해 음악을 듣던 문화가 MP3나 온라인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변해버린 지금, 그들은 어떤 모습으로 음악과 함께 살아가고 있을까.

<연출의도>
 지금도 세계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우리는 그 변화 속도에 적응해야만 뒤쳐지지 않는 환경에서 살고 있다. 무언가를 빨리 취하고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생활은 편리해졌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을 제대로 곱씹어볼 여유는 없어졌기에 삶을 사는데 중요한 의미들은 하나 둘씩 간과되거나 망각되고 있다. '음악' 역시 마찬가지이다. 온라인을 통해 무형의 파일을 손쉽게 얻을 수 있게 되고부터, 혼자서 그것들을 즐기다가 지겨워지면 버리고 금세 또 다른 것을 취할 따름이다. 사람 몇이 모이면 자연스럽게 음악에 대한 이야기들을 주고받던 풍경도 불과 몇 년 사이에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동시에 사람들은 공동체 문화가 점점 부족해지고 있음을 걱정하고 아쉬워한다. 따지고 보면 음반 산업의 불황과 함께 사라진 수많은 레코드 가게들이 바로 이런 공동체 문화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는 사실을 쉽게 떠올리지 못하는 것 같다. 나는 <빌보드 레코드>를 만들면서 음악과 음반을 통해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들을 통해 또 새로운 음악과 음반을 만날 수 있었던 레코드가게라는 공간을 담아내고 싶었다.
아울러 무대 위에서 화려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뮤지션이 주인공인 영화들과는 다르게 단지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하는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 싶기도 했다. 좋은 음악은 단지 뮤지션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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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다큐필

    | 2007/12/11 13:49 | PERMALINK | EDIT | REPLY |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


    - <빌보드 레코드>(배찬동, 2007)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은 내 블로그의 모토다. 따지고 보면 이 세상 모든 것이 사라져가고 있다. 마모든, 실종이든, 이별이든, 망각이든, 죽음이든, 그것들이 사라져가는 사태는 막을 수도 부정할 수도 없다. 나도,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정말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언젠가는 다 사라져갈 운명에 처한 존재들이다. 우리들이 보이지 않는 관계들을 맺고 있는 터전인 이 블로그라는 공간도 영원한 것은 아니다. 언젠가는,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사라질 것이다. 우리에게 남는 것은 다만 그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뿐이다. 이 그리움 때문에 결국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이다.
    레코드는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내게도 아직 턴테이블이 남아 있고, 거기에 얹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아날로그 기록 매체 레코드판이 다수 남아 있다. CD로 듣는 베토벤의 교향곡과 레코드판으로 듣는 베토벤의 교향곡은, 똑같은 지휘자에 똑같은 오케스트라에 똑같은 최초 녹음 연도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아니 전혀 다르다.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가 없다. 레코드판으로 듣는 푸르트벵글러와 CD로 듣는 푸르트벵글러는 똑같은 모노 녹음임에도 어찌 이토록 느낌이 다른가. 카잘스의 첼로 음색도, 메뉴인의 바이올린 음색도, 호로비츠의 피아노 음색도, 심지어 카라얀의 베를린 필조차도 어찌 이렇게 다를 수 있는가. 마일스 데이비스의 ‘카인드 오브 블루’는 또 어떤가.
    다르다는 것은 중요하다. 다르기 때문에 보존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 다른 느낌, 그 다른 감흥을 어찌 내버릴 수 있다는 말인가. 요컨대 나는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턴테이블과 레코드판들을 버릴 생각이 추호도 없다. 버리는 순간 나는 그것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하염없이 시달리다 몸져눕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 스스로가 완전히 사라져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끔찍하다.
    이 다큐는 그 엉성한 촬영과 약간은 요령부득의 이어붙이기와 개념 없는 조명과 맥 빠진 인터뷰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관심으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빌보드 레코드라는 이 ‘촌스러운(!)’ 공간이 자아내는 향수는 무지하게 자극적이다. 감독이 그것을 자극적으로 보이게 찍어서 자극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자극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은 이제 명백히 사라져가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이 사라져가는 사태를 막을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공간을 더 이상 사라지지 않도록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을 그리워하는 것뿐이다.
    바로 이 그리움을 이 다큐는 시종일관 자극한다. 그리고 이 그리움을 품고 있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나는 이 다큐를 보면서 나처럼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을 똑같이 품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위로를 받는다. 바로 이 위로가 이 다큐의 목적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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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시칙스: 셧업 앤 싱 / Shut Up & Sing
 
2007.11.28.Wed.20:20

감독 : 바바라 코플, 세실리아 펙 Barbara Kopple, Cecilia Peck
제작년도 : 2006 / 러님타임 : 91min / 제작국가 : 미국

<시놉시스>
미국 컨츄리 뮤직의 상징이자 여성 뮤지션으로서 역사상 최고의 음반 판매량을 기록한 당차고도 매혹적인 밴드 딕시칙스. 2003년 런던에서 열린 딕시칙스의 공연에서 부시 대통령에 대해 거침없이 불만을 드러냈던 메인 보컬 나탈리 메인즈의 발언은 상상 이상의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외국에서 미국을 공공연하게 비난했다는 이유로 방송 금지에서부터 대중의 거센 비난, 부시 대통령의 강한 반감 표현과 안티팬의 암살 위협까지 그들에게 다가오는 시련은 더해만 가는데.. 하루 아침에 바닥으로 내쳐진 미국 최고 컨츄리 밴드의 위상은 과연 회복될 수 있을까. 현실 속 민주주의가 말하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신랄하고도 충격적인 진실이 거침없이 그 속내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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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다큐필

    | 2007/11/29 11:19 | PERMALINK | EDIT | REPLY |

    영원한 자유의 노래


    그녀는 말한다...
    아니, 노래한다...
    나는 대통령이 우리 텍사스 주 출신이라는 사실이 부끄럽다―
    이 후련한 카타르시스...
    이 화끈한 해방감...
    이 눈부신 스트레이트 펀치...
    이 휘황찬란한 하이 킥...
    이 행복한 자유로움...
    하지만...
    자유란 어디까지 허용되는 것일까...
    자유란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 것일까...
    자유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 것일까...
    어디까지 자유가 허용될 때 그것을 진정한 자유라 할 수 있는 것일까...
    어디까지 허용되는 자유가 진짜 자유일까...
    인간은 자유가 어디까지 허용될 때 진정 자유로움을 느끼는 것일까...
    대통령을 부끄러워할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는 것...
    그렇다면 대통령을 부끄러워한다고 말할 수 있는 자유는?...
    이 두 가지 자유...
    느끼는(혹은 생각하는) 자유와 표현하는 자유...
    딕시칙스 그룹은 이 두 가지 자유를 누렸다...
    아무도 이 자유를 침해할 수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되는 것...
    그들이 이 자유를 이미 누렸다는 것으로...
    그 침해불가능성은 증명된 셈...
    하지만 이 자유는 대가를 치러야 하는 자유다...
    이것이 현 시점 미국에서 허용되는 자유의 한계상황이다...
    문제는 이 대가를 치르지 않을 자유가 없다는 것...
    대가의 속성이 바로 그런 것 아닌가...
    거부할 수 없다는 것...
    문제는 딕시칙스로 하여금...
    그 대가를 치르게 만드는 자유를 누리는...
    또 다른 사람들 혹은 세력들이 존재한다는 것...
    그들의 자유라는 것도 있다는 것...
    하나의 자유와 또 하나의 자유가 일으키는 충돌 혹은 추돌...
    이 충돌 혹은 추돌의 자유...
    그러니 영원한 것은 자유가 아니라 노래다...
    딕시칙스는 자유를 누리고...
    그 대가를 치르고...
    그리고 줄기차게 노래한다...
    이 자유‘들’의 얽히고설킴의 허용이 소중한 것 아닌가...
    대가를 치러야 하는 상황이 부당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지 않는가...
    그것도 자유의 한계상황이 빚어내는 또 하나의 상황이므로...
    다만 한쪽에서는 대가를 치르고...
    다른 한쪽에서는 대가를 치르게 만들고...
    그러는 와중에서도 노래는 계속되고...
    신기한 것은 한쪽이 치른 대가를...
    다른 한쪽이 다른 형태로 또 다시 치러야 한다는 것...
    시간이 그렇게 만들고야 만다는 것...
    시간은 자유의 편이라는 것...
    시간이 자유의 편이 아니라면...
    인간은 도대체 무슨 수로 이 자유의 한계상황을 견뎌낼 것인가...
    딕시칙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딕시칙스의 노래가 중요한 것...
    아니, 딕시칙스의 노래하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 것...
    왜?...
    딕시칙스는 노래할 때 가장 아름다우므로...
    그 아름다움이야말로...
    자유를 위한 대가를 치른 자에게 시간이, 노래가 주는 보상이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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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가의 수수께끼/ Elgar's Enigma: Biography of a Concerto

2007.11.21.Wed.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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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애니 골드슨 Annie Goldson
제작년도 : 2006 / 러님타임 : 52min / 제작국가 : 뉴질랜드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의 첼로 협주곡에 담긴, 사랑과 실패, 그리고 죽음과 비밀 등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 나선다. 그의 곡처럼 낭만적 정서로 흠뻑 젖어 있는 이 작품은, 그의 전기를 따라감과 함께 그의 뉴질랜드 여정을 따라가는 기록물이기도 하다.

<작품리뷰>
에드워드 엘가는 ‘위풍당당 행진곡’으로 알려진 영국 낭만주의 음악의 대가이다. 그의 첼로 협주곡 E단조 85번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낭만적 정서로 젖어있다. 낭만적 요소의 근원은 엘가가 겪은 ‘숨은 이야기’에서 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와 동시에 사랑을 중심으로 엘가의 전기를 다루면서 그의 작품이 어떻게 뉴질랜드와 연결 되었는지 따라간다. (이창성) EIDF2007 상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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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래스톤베리 / Glastonbury
2007.11.14.Wed.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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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줄리엔 템플 Julien Temple
제작년도 : 2006 / 러님타임 : 138min / 제작국가 : 영국

1970년, 마이클 이비스라는 젊은 농부는 1,500명의 사람들로 하여금 1파운드의 가격에 주말 내내 팝과 포크 가수들의 공연을 볼 수 있도록 150에이커에 달하는 자신의 농장을 개방했고 그것은 글래스톤베리 음악축제가 탄생하는 순간이 되었다. 다음해, 윈스턴 처칠의 손녀를 비롯한 몇몇 돈 많은 히피들은 이 이벤트가 커질 수 있도록 기금을 모았고, 12,500명의 사람들이 존 바에즈와 데이빗 보위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지난 30년 동안 글래스톤베리의 이 부유한 농장은 7월말 가장 더운 주말에 수천의 사람들이 광적인 야외 콘서트를 즐길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해왔다.

<글래스톤베리>는 지난 30년간 우리들의 인생을 비추는 거울 같은 영화이다. 물론 축제가 심장에 간직하고 있는 변치 않는 정신과,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일상적인 삶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이 영화를 역동적으로 만든다.  -줄리안 템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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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자 올스타 밴드 / The Refugee All Stars


2007.11.07.Wed.20:20

감독 : 자크 나일스, 밴커 화이트 Zach Niles, Banker White
제작년도 : 2005 / 러닝타임 : 78min / 제작국가 : 미국, 기니, 시에라리온

‘세계에서 가장 살기 어려운 나라’ 시에라리온 출신의 6명의 음악가가 밴드를 만든다. 전쟁과 무력은 그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고, 악기를 구하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이지만, 이들의 음악은 현실을 역설적으로 반영한다. 이들의 앨범인 ‘망명자처럼 살기’는 미국과 유럽 전역에서 발매되어 1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작품리뷰>

정부군과 반군, 그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었던 망명자 올스타 밴드. 모든 것을 잃은 이들이 여전히 웃음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음악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혹독한 시절에도 끊이지 않는 이들의 노래와 웃음을 들려주기 위해 노력한다. 그들의 웃음은 세상의 끝, 폭력의 현실 속에서 뚫고 나온 너무도 소중한 삶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전일성)    EIDF2007 상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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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다큐필

    | 2007/11/14 10:51 | PERMALINK | EDIT | REPLY |

    음악, 신의 은총?...

    - <망명자 올스타 밴드>(자크 나일스 & 밴커 화이트, 2005)


    아프리카...
    시에라리온...
    세계에서 가장 살기 어려운 나라...
    그리고 음악...
    같은 시대, 같은 하늘을 이고 살아가면서도...
    이토록 다른 삶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는 것...
    인도와 아프리카를 생각하면...
    언제나 음악이 같이 떠오르는 것은 나만의 현상일까...
    그 무지무지하게 '하드'한 가난...
    그리고 그 무지무지하게 분방한 리듬으로 충만한 음악...
    시에라리온의 경우는...
    여기에 전쟁의 무게를 하나 더 얹어야 한다...
    그 무자비한 전쟁...
    그 잔인무도한 살육...
    그 밑도끝도 없는 희생...
    도대체 음악이 없다면...
    아니, 음악이라도 없다면...
    지금 시에라리온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 지옥경을 무슨 수로 견뎌낼 수 있을까...
    우리는...
    그 지옥같은 가난과 전쟁 속에 그들을 살게 해놓고...
    무슨 구원의 동아줄처럼 음악을...
    음악의 재능을...
    혹은 음악에 대한 기호를...
    그들에게 내려준 신을 가리켜...
    자비롭다고 해야 하는 것일까...
    팔이 잘리고...
    가족이 죽고...
    제 자식을 절구에 넣어 찧어야 하는 극한 상황을...
    그들이 음악 속에서 견디고 있다는 것...
    분명한 것은 이것뿐이다...
    분명한 것이 이것뿐이니...
    그들의 삶은 얼마나 암담한 것인가...
    그들의 음악은 도대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음악이란 인간에게...
    도대체 무엇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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