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아이 : 2007.12.12 @ 하이퍼텍 나다
Posted 2007/11/10 18:292007.12.12.Wed.20:20
감독 : 백연아
제작년도 : 2007 / 러닝타임 : 100min / 제작국가 : 한국
<시놉시스>
‘미쳐부리게’ 소리를 좋아했음에도 정작 본인은 그것을 할 수 없었던 수범이 아버지는 여섯살짜리 아들에게 이 소리를 시킨다. 수범이는 아버지에게 서럽게 맞아가면서도 완창에 4시간 반이 걸리는 <심청가> 를 6년만에 띈다. 수범이는 이제 어려서부터 품에 넣고 소리를 주던 이임례 명창을 떠나 국창 조상현 선생에게 <춘향가>를 배우려 한다.
아버지에게서 귀동냥으로 배운 판소리로 세살때 부터 공연을 시작한 성열이는 전국 방방곡곡에 할머니 팬들을 가지고 있는 7년차 공연 베테랑이다. 알콜 중독인 아버지로 인해 때때로 폭력에 휘둘리기도 하는 성열에게 소리는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라 아버지와의 관계를 지켜주는 방패이다.
<연출의도>
자기가 ‘꿈’이라고 생각했던 것, 그러나 이루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그것’을 온전히 아들에게 투사하는 아버지와, 잘못된 ‘꿈’을 꾸어왔다고 생각하면서도 더 이상 ‘꿈’이 아닌지도 모르는 ‘그것’을 부둥켜 안고 아들에게 전해주는 아버지.
영화의 주인공인 두 소년이 사는 삶과 환경은 너무나 다르지만 그들은 같은 노래를 부르며, 그들에게는 각자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아버지가 있다. <소리아이>는 ‘소리’라는 공통점을 가진 두 소년의 개인적인 삶, 그 속에서 소년들이 갖게 되는 기대와 불안, 그리고 성장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들에게 모든 것을 건 ‘아버지’와 자신의 모든것을 걸어야 하는 ‘판소리’. 그 사이에서 두 소년이 갈등하는 동안 카메라는 2년에 걸쳐 이들 곁에서 소중한 변화의 순간들을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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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필
| 2008/01/18 11:26 | PERMALINK | EDIT | REPLY |들리는 소리, 보이는 소리
- <소리아이>(백연아, 2007)
임권택의 <서편제> 한 부분은 그대로 <소리아이>의 한 부분이다. <소리아이>를 보고 있노라니 <서편제>가 얼마나 위대한 작품인지를 새삼 알겠다. 송화도 한때 소리아이였다. 아비가 자식을 소리꾼으로 만드는 일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모습 또한 어찌 그리도 똑같은가. 김명곤의 연기가 얼마나 명연이었는지도 새삼 알겠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 버전의 <서편제>다. 그렇게 볼 수밖에 없다. <서편제>의 그림자가 <소리아이>를 보는 내내 스크린 저 너머에서 어른거렸다. 아마도 이 다큐멘터리의 감독도 <서편제>를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감안했던 것일까. 카메라가 뒤로 빠져 롱 쇼트의 화면을 만들어낼 때, 그 롱 쇼트의 화면 속에 소리아이와 소리아이의 소리를 함께, 동시에 담아낼 때 그것은 속절없이 <서편제>였다. 정일성의 카메라를 <소리아이>가 자꾸 흉내 내려 했다고 말하면 일종의 모독이 될까?
이상한 것은 소리를 소리만으로 들을 때와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소리를 들을 때의 감흥이 다르다는 점이다. 영화 속으로 들어온 소리는 이상하게 감동적이다. 생각해보라. 이따금 TV에서 보여주는 판소리의 패턴을. 얼마나 따분한가. 물론 TV화면과 극장의 스크린을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다. 또 TV의 카메라와 영화의 카메라는 같은 방식으로 소리꾼을 찍지 않는다. 찍을 수도 없다. 그러니 좀 더 공정하게 말하자면 TV 속의 소리가 따분한 것이 아니라, TV 자체가 따분한 매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서편제>가 그렇게 만들어놓았다. 나는 <소리아이>를 보면서 마치 그 모든 인물들이 스스로(!) <서편제> 속 인물들을 흉내 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전혀, 따분하지 않았다. <소리아이> 속 소리는 <서편제> 속 소리가 그랬듯이, 감동적이었다. ‘소리’에 관해서라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한데 문제가 있다. <소리아이>가 지향하는 바는 도입부에 다 나와 있다. 이 영화의 목표는 ‘아이’가 아니라 ‘소리’다. 그래서 <소리아이>가 관객에게 처음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이’가 아니라 ‘소리’다. 그렇다. 영화는 정말 ‘소리’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보여준다. 놀라워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이미 <서편제>에서 눈 덮인 산을 바라보며 소리 연습을 하는 송화의 뒷모습에서 소리를 들은 것이 아니라, 보았다. 이 경험은 일종의 원체험과 같아서 소리와 관련한 어떤 영화를 보더라도 때마다 되살아나 우리의 경험을 통제하고 간섭할 것이다. 싫어도 어쩔 수 없다.
문제는 정작 ‘아이’가 아니라 ‘소리’를 보여주겠다고 선언은 해놓고, 이 다큐멘터리는 점차 ‘아이’ 쪽으로 방향을 튼다는 것이다. 여기서 일종의 서브플롯들이 몇 가지 생겨난다. 이 서브플롯들은 아비와 아이, 소리와 아이, 재능과 아이, 가르침과 배움, 스승과 제자, 경제력과 재능, 욕망과 재능 따위의 대립개념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들이다. 여기서 소리는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소리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영화는 끊임없이 소리를 들려주지만, 더 이상 보여주지는 않는다. 아니, 보여주지 못한다. 끝까지 그렇다. 애초의 선언이 무색해지는 대목이다.
결국 영화는 이 대립개념들의 길항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도록 관객을 유도하는 데 에너지를 쓴다. 소리를 보여주려는 애초의 의도가 가까스로 살아나는 것은 영화의 맨 마지막 부분에 와서다. 두 소년의 각기 다른 목소리가 똑같은 하나의 소리를 부를 때, 아니 할 때, 비로소 소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많이 늦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 그렇다고 느꼈다. 영화가 끝나고 남는 아쉬움의 8할은 이 때문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든 생각이지만, 이 다큐멘터리가 말의 엄격한 의미에서 정말로 완성되려면 아이들의 변성기까지 가야 한다. 변성기 이후 소리와 이 아이들의 관계가 어떻게 바뀌는지가 진정한 핵심이다. 아니, 그것이 핵심이어야 한다. 하긴, 그건 그때 가서 또 찍으면 된다. <소리아이>를 보면서 이 열 살 혹은 열한 살짜리 이 아이들을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바로 그 운명적인 미래에 대한 마땅한 우려 때문이기도 하다. 아이들이 그 운명을 이겨내고 명창으로 거듭나기를 소망하는 마음을 감독은 어쨌거나 관객의 마음속에 지펴놓는 데 성공했다. *